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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여와 자상은 서로 마음이 통하는 친구였다. 장마가 한 열흘이나 계속되던 어느 날, 자여는 문득 생각했다.

'자상이란 친구, 먹을 것이 없어서 퍼져 누워 있으리라.'

 자여는 밥 꾸러미를 들고 자상의 집을 찾았는데, 안에서 노래인지 우는 건지 모를 이상한 소리가 금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아버진가 어머닌가, 하늘인가 사람인가..."

 굶은 탓인지 숨넘어가는 소리로 이렇게 되풀이하고 있었다. 자여가 안으로 들어가 말했다.

 "이상한 노래로군. 어찌 된 건가?"

 자상이 대답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토록 가난한지 생각해보았으나 도무지 알 수가 없네. 설마 부모가 자식이 가난하기를 원했을 리 없고, 더구나 공평 무사한 하늘이 나만을 차별해서 이 꼴을 만들었을 리도 없지 않겠나? 이모 저모로 생각해도 도저히 알 수가 없네. 누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닌데도 이토록 가난하니, 이 역시 운명이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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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 학생시절에 봤다면

'재물에 뜻을 두지말자는 이야기구나, 소박하게 살아가도록 하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사회인.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을 해야하는 사회인. 게다가 이 곳은 대한민국.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서민들은 생계가 힘들어지는 스릴 넘치는 곳 스릴민국.

 이런 곳에서 운명을 탓하며 가난한 것에 대해 그러려니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까....왠지 사회에 찌들어가면서 장자의 글귀에 대한 반박이 생겨나는거 같아 가는건 아닐까?

 다른 관점을 생각해보자....

....

....

자상의 생각에 동조하지 못하겠다.

그런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고 그냥 살아가는 것 또한 운명이요

그런 운명일지라도 열심히 살아보자고 해서 가난에서 벗어난다면 그 또한 운명일터이니


올해도 얼마남지 않았다.

계획표데로 이루어진 것은 거의 없다.

그말인즉슨 난 2011년을 정말 허무하게 보냈다고 생각된다.

한편으로는 많은 깨달음을 얻고 어떻게 무엇을 할지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내 삶의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되기도 하였다고 생각한다.


남은 두달여간, 열심히 내 삶에 대해 고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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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평만은 지리익에게서 용을 죽여 요리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것을 배우기 위해 천 금을 탕진했고, 비법을 터득하는데 3년이 걸렸다. 그러나 용은 흔하지도 않을 뿐더러 잡기도 힘들어서 그 기술은 전혀 쓸모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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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이면 짧은 글일수록 더욱 다양한 시각의 의미부여가 가능한 것 같다. '1+1=2 이다' 가 아닌 '1+1=? 무엇인지 상상 그 이상의 것이 될것이다' 라는 것인 장자의 매력이니, 이 글 또한 그러한 느낌을 반영하는 글구같다.

 

사실 예전에 용요리 이야기는 읽어도 대충 넘기게 되었다. 음, 그렇구나하면서, (예전에 만화 슬레어이즈에 용요리 관련 에피소드가 나왔었는데 그 에피소드만 생각나고..)

하지만 최근 심정을 바탕으로 글을 읽어보니 중요한 포인트가 있는 글같이 보였다. 현재 나에게 필요한 가르침이라고나...

 

현재하고 있는 일중 자신이 투자할 가치가 없는 것에는 투자하지 말자는 것.

나는 항상 그래왔었다. 능력은 없으면서 욕심은 많아가지고 한번에 여러가지 일들을 하려고 하였고, 결국 어느것 하나 제대로 이룬게 없었다.

얼마전 이것저것 치고쳐서 이제는 이런일들에 시간을 투자하지 말자라고 생각을 했었지만 뭔가 마음이 싱숭생숭해서인가? 또 다시 이것저것 여러가지 일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시간경영이라도 잘해서 초단위로 모든것들을 진행하면 모를까, 그런 집중력이라든지 꼼꼼함이 부족한 나인걸 알기에 또 다시 심사숙고하게 만드는 글귀라고 생각된다.

다시 한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리스트를 만들고 지금 할 필요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미루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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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이자가 허유에게 배움을 청하자 허유가 이렇게 물었다.

"너는 요에게서 배웠다던데, 무엇을 배웠느냐?"

"인의의 실천에 힘쓰고, 시비와 선악을 분명히 하라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뭣하러 새삼 나를 찾았느냐? 요가 이미 네 이마에 인의를 새겨넣고 시비라는 말로 코를 잘라버렷는데, 자유롭게 거리낌이 없는 큰 길로 어찌 너를 인도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의이자는 구히지 않고 말했다.

"당연한 말씀이지만, 설사 도에는 이르지 못해도 근처에는 가고 싶습니다"

"안된다. 장님은 앞에 미인이 서 있어도 볼 수가 없으며, 곱게 수 놓은 비단을 들고 있어도 그 아름다움을 알 수 없다. 너는 이미 도와는 인연이 없어졌다."

"옛날 무장이 그의 아름다움을, 거량이 그의 힘을, 황제가 그의 지혜를 잊은 것은 모두 도의 불갈에 녹아 다시 단련된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며 조물주가 나에게도 입묵을 녹여 없애고, 코를 처음데로 붙여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끔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네 소원데로 잘 될지는 알 수 없으나, 그토록 소원이라면 말해보겠다. 내가 스승으로 삼은 도는 만물을 있게끔 해주고, 한없는 은혜를 베풀면서도 무심하여 자신이 은혜를 베푼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유구한 과거에서 영겁의 미래에 걸쳐 하늘과 땅을 덮고, 삼라 만상을 쉴새없이 만들어내면서도 힘을 자랑하지 않는 위대한 존재이다. 그래서 나도 이 스승을 따라 무의 경지에서 놀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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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쓰는 장자

2011년도는 왠지 모르게 계속 꼬이고 복잡하고 머리가 아픈 해인거 같다. 나이도 먹어가고 점점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것저것 겪으면서 자신의 한계도 느끼고 꿈과의 타협을 해야될거 같고, 마음은 초조해지고....그런 상황에서 장자를 통해 다시금 마음을 추스리고자 간만에 썼는데, 역시 장자다

한동안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 불안한 요소는 오래도록 갈듯하다. 생각해보니 원인인 즉슨, 현재 흔들리고 있는 나의 상태를 다잡아줄 멘토가 없다는것!

내가 생각하는 것과 나아가려고 하는 것, 이에 맞추어 애기를 하면 명쾌한 해답을 줄수 있는 사람이 주위에 없다는 것이다. 존경하고 배움을 받을만한 사람들은 있지만, 나를 이해하고 방향을 잡아줄 사람은 없다는것!

의이자는 요에게서 배움을 받았다. 하지만 의이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도에 나아가는 방향은 얻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허유에게 다시금 도에 대한 가르침을 구하려 하였건만, 이미 시비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진정한 도의 깨달음을 얻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잘못된 길로 한참을 간 결과,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에 도달하기 힘들게 되었다.

지금 나는 내가 원하는 길로 바르게 가고 있는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꿈은 10대말에 형성되었고, 꿈의 원형은 유지된채로 지금까지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오면서 이걸할까? 저걸할까? 고민에 빠지고 시행착오를 몇번이나 겪었던가.

작년에만 해도 그렇지 않았지만 요즘 다시 이 고민에 빠져들고 있다. 지금 내가 선택한 이 길이 맞는 길일까? 나에게 적합하고 내가 꿈에 도달하기에 적절한 길을 선택한걸까?

어떠한 스승의 가르침도 없이 나자신이 선택한 길들...

일단 의심은 제껴두고 의심할 시간에 조금 더 이 길을 따라 한발자국이라도 더 가야겠다...그러다 운좋으면 희대의 멘토께서 나타나셔서 날 인도해주실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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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가 언제나처럼 복수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는데, 초나라의 두 중신이 왕의 명령을 받고 찾아왔다. 사자는 말했다.

 

"초나라의 재상이 되어주십시오. 우리 임금님의 원이옵니다."

 

장자는 낚싯줄을 드리운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귀국에는 죽은 지 3천년이 된 영험한 거북의 등껍질이 있다고 들어소. 임금께선 그것을 비단보로 싸서 상자에 넣어두고 소중히 제사를 드린다고 합디다. 그런데 그 거북을 보시오. 죽은 뒤에 제사를 받는 편과, 살아서 흙탕물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는 편을 생각해보면 어느게 더 낫겠소?"

 

"그야 살아 있는 편이 더 좋겠지요"

 

그러자 장자는 말했다.

 

"자, 그만 돌아가주시오. 나도 진흙 속에 꼬리를 끌며 살고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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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에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몇개 더 있다(지금 기억나는건 2개 더 있는걸로 알고 있다.)

외편은 장자가 직접 쓰지 않은 것들이 많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러한 연유로 비슷한 내용의 글들이 쓰여있지 않나 싶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그 부분에 씌어져 있는 장자의 글을 쓰고 그에 대한 현재의 생각등을 써보는게 이 게시판의 주제였는데...글쎄

오늘 글귀는 크게 와닿지 않는다. 어쩌면 나도 이미 사회에 나름 찌들어버린게 아닐까?

 

장자는 자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크게 치르지 말고 그냥 산속에 내버려두어 산짐승들의 먹이로서 자연스럽게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제자 및 후세의 사람들에게 추앙 받고자 하는 마음도 없이..

내가 좋아하는 베트남의 영웅 호치민 아저씨 역시 사후 화장을 부탁하며 간소한 장례식을 원하였다. 하지만 그의 업적을 기리고자 사람들은 그의 시체를 냉동보관하여 호치민 주석의 묘에 안장시켰다. 호아저씨는 이 모습을 하늘나라에서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위대한 영웅을 추모하고 기리는것....이것은 곧 그들의 사상이 후세의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자리잡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거북의 출세라는 글에 적혀있는 것은 오직 거북의 입장에서만 내본 결론이다. 그리고 이미 죽어있는 상태인 거북의 등껍질이 한나라의 국왕에게 소중한 존재로 와닿고 거북의 등껍질을 통해 나라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며 진실된 마음으로 제사를 지낸다면 그 거북은 자신을 희생하여(그런데 그 거북이 자연사 한것인지, 등껍질을 얻기 위해 사람들이 직접 잡아서 죽인것인지 불분명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는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추모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것을 악용하거나 맹목적으로 따르는 모습들은 큰 문제를 야기시킨다. 왜 우리가 영웅들을 추모하고 마음속으로 그들의 사상을 다시금 되짚어보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렇게 장자의 글에 반하는 글을 써보는것도 처음인거 같다. 하지만 이야기를 통해 철학을 전파하는 장자의 글에서는 어쩌면 이렇게 열린결말(?)로 이러한 생각을 이끌어낸것도 의도된 것인지도 모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여기서 사팍 시즌 14- 2편 이 생각이 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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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양이라는 자가 벼슬을 얻기 위해 초나라에 왔다. 우선 왕의 측근인 이절을 통해보았으나 왕이 만나주지를 않자 이번에는 왕과를 찾아가 부탁했다. 그러나 왕과는 한마디로 거절하며, 공열휴에게 찾아가 보라는 것이었다. 측양이 그의 사람됨에 대해 묻자 왕과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사람은 겨울이면 강에서 자라를 잡고, 여름이면 산속에서 일월을 벗삼아 놀고 있소. 누군가 그에게 집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강가와 산속이라고 대답했다더군요. 아무튼 나로서는 저 지혜로운 이절이 못하는 일을 떠맡아 해낼 수가 없소. 이절은 비록 덕은 없지만 굉장히 지혜로워서 늘 겸손학 척, 남과의 교제를 귀시처럼 해나가는 사람이오. 하지만 부귀에 눈이 먼 사람이라 서로 돕고 지낼수록 덕을 향상시키기는 커녕 덕을 손상시키기 일쑤인 인물이오.. 이런 속담을 들은 적 있소? '몸이 언 사람은 봄이 되어도 옷을 빌리며, 더위를 먹은 사람은 겨울이 되어도 찬바람을 쐬고자 한다.' 초나라 임금은 그 사람됨이 존대하고 엄격하며, 범죄자에 대해서는 호랑이처럼 조금도 용서가 없소. 간사한 악당이 달라붙어 그의 마음을 녹이든가, 고상한 인격자가 그 미친 것 같은 마음을 식혀주지 않는 한 방법이 없소. 반면에 성인은 가난하여도 가족이 가난함을 잊고 도를 즐기게 하며, 영달하면 왕공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귀함을 잊고 백성들과 동화하도록 만드는 사람이오. 어떤 사물이나 적응해 즐기고, 어떤 인물과도 교제해 즐기지만 결코 자기를 잊는 일이 없소. 그러기에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주위 사람을 평화롭게 하고 함께 사는 사람드을 감화시켜나가오. 아버지와 자식이 있어야 할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 덕을 순수한 마음으로 베푸니 마치 천지의 덕과 같소. 그러기에 공열휴를 찾아가서 부탁하라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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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장자를 펼쳐서 본 페이지에 나온 글. 장자책을 두고두고 보면서 여기저기를 뒤적였는데 오늘 본 글은 흡사 처음 본 느낌의 글 같았다. 하지만 의미는 장자의 그것과 일치하는듯하다(보통 잡편들의 글이 장자가 직접 쓰지 않은 글이란 말이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딱 보는 순간 '아 이거다' 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성인은 진실로 어디에도 적응하고 누구와도 교제할 수 있다고 하였다.

다른 말들보다 이 말이 요즘 가장 와닿는 느낌의 구절이다.

나는 항상 나자신이 어디에나 적응을 다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게다가 요 몇년 사이에 다양성의 가치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며 그 다양성을 인정하고 포용할 줄 아는 마음가짐이 생겨났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계속적인 사회생활과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 새로운 일들을 접하며 점차 사회의 혹독함에 대해 느껴가며, 나이가 들수록 나라는 존재에 대한 한계를 조금씩 인식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어디에나 적응하는 능력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인위적인 적응, 가식적인 교제. 사회라는 울타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것일까?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 한치의 가식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극히 없을 것이다. 그나마 이 가식의 허울이 절실히 필요한 업무를 하지 않은 덕분에 어느정도 타인에 비해 스트레스라는 것을 적게 받으며 생활해 나가고 있지 않나 싶다.

자유로운 사귐속에서 모두와 함께 즐기며 그들이 힘든 현실속에서도 웃음을 잃지않고 그 곳에서도 나름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도록 나 자신이 진정 가식이란 악세서리를 없애고 모든 것을 끌어 안을 수 있는 마음을 키워나가자...이것이 곧 내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도약에 불을 지펴주는 시초이자, 지속적인 연료가 될 것이다.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괜찮다는 인식을 한단계 뛰어넘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을 끌어안는다면 세상은 조금이나마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우선 남을 헐뜯지 않음에서 시작하자(하지만 헐뜯음과 충고, 걱정은 종이한장의 차이가 있는거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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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상호, 맹자반, 자금장 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무심히 서로 사귀고, 무심히 행동하는 사람은 없을까? 세속을 떠나 하늘 높이 노닐며, 생사를 잊고 영원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은 없을까?"

세 사람은 뜻이 통하여 빙긋 웃고는 함께 친구가 되었다.
세월은 흘러 이윽고 자상호가 죽게 되었는데, 장례식도 치르지 않고 시체를 버려두었다는 소식을 들은 공자가 제자인 자공을 보내 장례식을 치르게 했다.

자공이 자상호의 집에 와보니 맹자반은 봉당에서 거적을 엮고, 자금장은 금을 타면서 노래하고 있었다.

"아아, 자상호여! 그대는 벌써 고향에 돌아갔는데, 우리는 아직도 이 세상을 방황하노라!"

자공은 이에 그들을 나무랐다.

"시신을 앞에 놓고 노래를 하다니,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소!"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 사람은 예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모양이군."

기가 막힌 자공은 돌아와 공자에게 사실을 이야기했다.

"대관절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교양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이 예의를 송두리째 무시해버리고, 죽은 사람 옆에서 노래를 부르고도 태연한 모습이었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대체 어떤 사람들입니까?"

공자는 대답했다.

" 글쎄다. 그들은 세상의 테두리 밖에서 살고 있고, 나는 그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이다. 사는 세계가 전혀 틀리는 것은 생각지 않고 조상을 보낸 내가 생각이 모자랐다. 그들은 조물자와 벗하여 우주의 근원에서 놀려 하는 인간이다. 삶을 혹이나 사마귀가 난 정도로 생각하고, 죽음을 종기가 터지는 정보로 생각한다. 따라서 삶을 기뻐하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육체를 빛은 물건으로 생각하기에 간과 쓸개, 귀와 눈을 다 잊고 생멸의 무한한 순환 속에 몸을 맡긴다. 이리하여 속세를 떠나 무위 자연의 경지에서 소요하는 것이다. 그들이 애써 세속의 예법을 지켜 세상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할 리가 없다."

그들을 칭찬하는 공자의 말이 자공에게는 이상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왜 규범에 따르고 계십니까?"

"나는 천형을 받은 사람이다. 인간 사회밖으로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는 운명을 지녔다. 그래서 아쉬운 대로 너희들과 함께 덜 구애받는 삶을 살도록 애쓰는 것이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 고기는 강에서 서로 잊고, 사람은 도 안에서 서로 잊는다는 말을 알고 있느냐? 고기를 살리는 것이 물이듯 인간을 참으로 살리는 것은 도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고기는 못 속에 있으면 절로 자라나고, 도로 나아가는 사람은 무위 속에 있어야만 그 천수를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자공은 다시 질문을 계속했다.

"그렇다면 기인이란 무엇입니까?"

"세속적인 눈으로 보면 그들이 이상할게 틀림없다. 그것은 그들이 세속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연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늘의 소인은 사람에게는 군자이고, 사람의 군자는 하늘에 대해 소인이다.' 라는 말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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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세상의 흐름에 존재하는 하나의 일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자유롭게 노니는 장자의 사상은 언제나 나의 혀를 두르게 만들며 세속에서 별거 아닌 것에 대해 고민하는 나 자신을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들의 근원적인 걱정거리 중 하나이다. 누구나 한번 생을 받고 태어났으면 사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므로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고 한다.

이러한 죽음을 삶의 일부로서 생각하지 않고 죽음에 대한 인간의 공포를 자극하여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자들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다. 특히 수많은 종교들을 보면 사후세계를 이야기하며 그들에게 그 종교를 믿으면 영생하고 사후에 행복한 곳으로 갈 것이라고 사람을을 꼬드긴다. 웃길 노릇이다.

수많은 종교의 경전들은 분명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인류를 평화롭게 만들어 주는 길잡이 역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경전들도 오랜 시간 사람들의 손에 손을 거치며 그들의 탐욕과 이기심이 자연스레 베어들며 진정 경전 속에 있는 참뜻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고 현혹시키는 말들로 사람을 홀리는데 사용되고 있다.



걸리버 여행기를 보면 걸리버가 말들의 도시인 휴이넘에 가게 된다. 그들은 항상 여유를 가지고 삶을 낙관하며 죽음을 슬픈 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한 그들의 모습에 반한 걸리버는 그 마을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지만 결국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고 그 곳에서 반쯤 미친 생활을 하며 삶에 답답함을 느끼는 모습을 보여준다.
휴이넘이 사는 그곳은 마치 장자와 노자의 도가적 철학이 물씬 담겨있는 곳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정말 이들의 사상의 물속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이 모인 곳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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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는 저것과 이것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저것 쪽에서 보면 이것은 저것이 되고, 저것은 이것이 된다. 즉 저것은 이것이라는 개념과의 비교 대립에서 비로소 성립되고, 이것은 저것이라는 개념과의 비교 대립에서 비로소 성립된다.

   그러나 상대적인 것은 저것과 이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삶과 죽음,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 등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다. 모든 사물은 서로 의존하는 동시에 서로 배척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속박됨이 없이 생성 변화하는 자연에 순응할 뿐이다.


   이것 또한 어떤 입장에 근거한 판단임에 틀림없으나 이 입장에서보면 이것과 저것은 상대적이 아니며, 양자는 동시에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한다. 즉 양자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같이 하여 나와 다른 것의 대립을 해소시키면 개별적인 존재를 초월하여 도추의 경지에 이른다. 도를 체득한 사람은 문짝의 지도리가 고리를 축으로 회전하는 것처럼 끝없이 변화하면서 그 무궁한 변화에 대응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 도추의 경지에 이르면 옳고 그른 것의 대립이 해소된다. 밝은 지혜에 따른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손가락의 개념을 분석하여 그 말이 존재로서의 손가락과 일치하지 않는다 하고, 말이라는 개념을 분석하여 그 말이 존재로서의 말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논증한 사람이 있다.


   만일 이들 궤변론자들이 이러한 논리로 우리들의 인식 능력이 불완전함을 강조하려 한다면, 그 방법은 오히려 잘못된 것이다. 개체를 초월하면 손가락이라는 존재는 손가락이면서 손가락이 아니고, 말이라는 존재는 말이면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상대성을 초월한 도의 입장에서 본다면, 손가락 하나도 천지라 할 수 있고, 말 한 마리도 만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말에 있어서는 옳고 그름의 구별이 명확하다. 도는 무한히 변화함으로써 완전한 존재가 되지만, 그것이 나타난 하나하나의 사물에 대해서는 그 각각에 해당되는 말이 필요하다.


   즉 그런 것은 '그렇다', 아닌 것은 '아니다' 라고 하듯이, 그 뜻이 확실히 정해져 있지 않으면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말의 표현 대상인 사물은 원래가 개별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존재다. 따라서 풀잎과 기둥, 문둥병자와 미녀 서시를 예로 든다면, 전자는 그 크기에, 후자는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해 각각 극단적인 차이를 보이지만 역시 동일한 것이다. 또한 아무리 상상을 벗어난 기괴한 사물이라 하더라도 도의 견지에서는 모두가 동일한 것이다.


   형식뿐만이 아니라 운동에 있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일면 파괴로 보이는 현상도 다른 면에서 보면 완성일 수 있고, 반대로 완성이 곧 파괴일 수도 있다. 즉 일체의 존재는 형식과 운동을 막론하고 어떠한 구별도 없는 것이다.


   이 만물제동의 이치를 체득한 사람은 사물을 선택하는 입장이 아니라 사물을 떳떳함, 즉 자연의 형상에 맡길 뿐이다. 떳떳하다는 뜻의 용은 쓴다는 뜻의 용과도 통하고, 이것은 다시 통한다는 통과 통한다. 자연의 작용에는 무리함이 없다. 통은 또 얻는다는 득과 통한다. 무리가 없는 작용을 통해서만 사물은 존재로서의 의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일체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경지에 도달했을 때 우리의 인식은 만유의 실상에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다. 도와의 일체화란 자연에 맡기려는 의식마저도 없는 상태를 이르는 것이다.


 




일체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경지.....


상대적인 평가와, 그러한 상대적인 평가에 길들여져서 편견이라는 시스템을 머리 속에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있어서 쉽지 않은 경지 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만물제동'의 원리는 장자 여기 저기서 볼 수가 있는 주요한 도의 원리 중 하나이다.


인간의 뇌 자체는 좀 더 편리하게 일상생활을 하기 위해서 몇몇 간단한 정보들은 단순화 시켜서, 다음 번에 그 정보를 마주쳤을때에도 복잡한 정보처리 과정을 생략하려고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기능이 편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만물을 보는데 있어서, 이것과 저것으로 나누게 되는 상대적 사고 및 편견을 낳게 되는 것이다.


이것 저것으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자세. 그리고 어떠한 존재에 대해서는 부정을 하는 그러한 마음가짐이 상대적인 박탈감과 같은 기분나쁜 감정을 계속 만들어내는건 아닌가 싶다.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면 상대적 행복을 느낄수도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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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사는 형벌을 받아 한쪽 발을 잃었다. 우사를 여러 해 만에 만난 공문헌이 놀라서 물었다.

"대관절 어찌 된 일인가? 그 발은 잘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단 말인가? 하늘의 뜻인가, 사람의 뜻인가?"

우사가 대답했다.

"놀라지 말게. 나는 형벌을 받았으나 그것은 사람의 힘이 한 일이 아닐세. 하늘이 나를 한 발만 가지고 태어나게 했을 뿐이네. 사람은 자신이 원해서 한쪽 발만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아닐세. 그러니 내가 한쪽 발을 잃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이라네. 자네는 들꿩의 기분을 아는가? 그들은 먹이와 물을 찾아 온 들판을 헤매고 다니지. 그것이 고생스러우나 새장 속에서 편안히 살려 하지는 않는다네. 배부르게 먹는 것보다 자유를 원하기 때문일세. 나는 발 하나를 잃은 뒤에야 참다운 자유를 알게 되었네."






장자는 우화로 이루어져 있어서 장자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덕분에 그 뜻이 마치 '장님 코끼리 만지듯'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서 다른 방향으로 해석이 되는 즐거움이 있다. 그래서 읽을때마다 다른 느낌을 주는 우화들이 많이 존재한다. 이런 연유로 가볍게 장자의 철학을 '무위자연' 이라는 한단어로 일축해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어떻게 보면 장자의 이야기 자체가 무언가 있어 보이게 하려는 수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글쎄 그런 의문이 든다면 직접 책을 읽어보시라!)


우사는 자신의 발을 잃은 것을 사람의 힘이 아님을 말하며 그 속에서 자유를 알게 된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로운 행동의 가장 기본이 되는 발을 잃었는데 진정한 자유를 알게 되었다니?

어쩌면 그 발의 중요함을 알게 되었음을 알리는 것은 아닌가 싶다. 흔히 말하듯이 공기와 같이 자신의 근처에 늘상 있기 때문에 느끼지 못하는 소중한 것들은 사라졌을 때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것. 바로 잃어버림은 그 잃어버린 것의 새로운 가치를 일깨울 수 있는 기회의 얻음이다.

그 상황에서 자신이 잃어버린 것에 대해 안타까워 하며 과거로의 회귀를 간절히 바라는 것 보다는 그것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나아가서 또 다른 소중한 것들에 귀를 기울여 보는 자세를 가지고, 그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려는 변화가 필요하다.

나 역시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지나간 과거를 회상하며 "그 땐 왜 그랬을까?" 따위의 회상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의 소중한 것을 지켜나갈 줄 아는 자세. 자신의 발전에 있어서 무엇보다 필요한 소양인 것이다.

과거 대신 현재를, 그리고 자신의 주위에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것이 사라진다면? 저것이 만약 없어진다면?
한번쯤 곧씹어 볼만한 물음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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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나라의 현자 안합은 위영공의 태자의 스승으로 부임하게 되자 위나라 대부 거백옥을 찾아갔다.

"나는 어떤 사람의 교육을 맡게 되었는데, 그는 손을 댈 수 없이 혹독하고 경박한 성품의 소유자로서, 남의 잘못은 무엇 하나 놓치지 않으면서 자신은 어떠한 악행을 되풀이해도 괜찮은 줄로 생각하고 있소. 그대로 두면 나라를 망치는 장본인이 될 것이며, 그렇다고 무리하게 바로잡으려 하면 내가 죽게 될 처지요. 내가 어떻게 처신하면 좋겠소?"

거백옥은 대답했다.

"그거 매우 흥미 있는 문제요. 먼저 계속 행실을 조심하여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노력해야만 하오. 그런 다음 상대방에게 공손히 행동하면서 융화를 꾀하는 것이 좋소.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소. 상대에게 공손하다 보면 자칫 상대방의 나쁜 짓에 말려들게 되고, 융화를 꾀하다 보면 자칫 감화시키려는 의도가 드러나게 되오. 상대방의 악행에 끌려들면 스스로 몸을 망치는 결과가 되고, 상대방을 감화시키려는 의도가 드러나면 당장 화가 미치게 되오. 상대방이 어린아이처럼 장난하거든 함께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이 좋고, 상대가 버릇 없이 행동하거든 함께 버릇없이 행동하는 것이 좋소. 또한 상대가 무모한 행동을 하거든 함께 무모하게 행동하는 것이 좋소. 어디까지나 공손하게 행동하면서 내 덕으로 상대를 감싸고, 나와 동화시키는 것이오. 사마귀의 예를 들기로 하겠소. 사마귀는 물건이 근접해오면, 비록 수레바퀴라 하더라도 앞발을 쳐들고 맞서려 하오. 결국은 당해내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것이오. 능력을 과신하여 태자에게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면 마침내는 사마귀와 같은 운명에 처할 테니 백 번 조심해야 할 거요. 범을 기르는 사람을 예로 들어봅시다. 범을 기르는 사람은 절대로 범에게 살아 있는 먹이를 주지 않소. 그것을 죽이려고 범이 살기를 띠기 때문이오. 또한 절대로 먹이를 통째로 주지 않소. 찢어 먹으려고 살기를 띠기 때문이오. 범을 기르는 사람은 범의 식욕에 따라 먹이를 조절하면서 어느 사이엔가 범의 살기를 없애버려, 마침내는 사나운 범을 완전히 길들이게 되오. 범의 성질에 따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오. 그와 반대로 범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범의 성질을 거슬렀지 때문이오. 아무튼 말을 좋아하는 사람은 좋은 그릇을 말의 변기로 쓸 정도요. 그러나 이토록 소중히 길러주어도 등에 때문에 갑자기 때리기라도 하면, 말은 재갈을 물어 끊고 미쳐 날뛰어 큰 상처를 입게 되오. 사랑이 원수로 변하는 것이오.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당신도 십분 조심해야 하오."



간만에 장자의 책에서 무작위로 펼친 항목이 바로 인간세 부분의 <범을 길들이는 법> 이라는 글이다.
제목을 보는 순간 바로 현직 대통령인 이명박이 생각이 났다.
안합의 대사에서

나는 어떤 사람의 교육을 맡게 되었는데, 그는 손을 댈 수 없이 혹독하고 경박한 성품의 소유자로서, 남의 잘못은 무엇 하나 놓치지 않으면서 자신은 어떠한 악행을 되풀이해도 괜찮은 줄로 생각하고 있소. 그대로 두면 나라를 망치는 장본인이 될 것이며, 그렇다고 무리하게 바로잡으려 하면 내가 죽게 될 처지요. 내가 어떻게 처신하면 좋겠소?
라는 부분이 있다. 딱 들어맞지 않는가? 과연 여기서 우리들은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좋을까? 어떤 말을 해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귀에 대빵만한 딱지가 붙어 있는 양반에게. 정말 흥미있는 문제이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우리의 나라를 완전하게 망치는 장본인이 될 인물. 무리하게 인터넷에 글을 올리다가(사실 무리하게 쓴 글도 아니다.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한 인터넷에서 그 정도의 의견피력은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잡혀간 미네르바. 그 외 나라를 조금이라도 바르게 만들고자 앉아서 디지털 세계로 나라를 위해 헌신하시는 많은 분들.

상대방이 어린아이처럼 장난하거든 함께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이 좋고, 상대가 버릇 없이 행동하거든 함께 버릇없이 행동하는 것이 좋소. 또한 상대가 무모한 행동을 하거든 함께 무모하게 행동하는 것이 좋소.
어린아이처럼, 버릇 없이, 무모한 행동을 하는 가카에 대해 우리도 똑같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맞대응을 하고 있다(어쩌면 아직 그러한 맞대응의 정도가 부족해서 효과가 덜 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나라 곳곳에서 어처구니 없이 세력을 잡은 조중동에 반해 진실된 주장과 의견들이 개개인과 몇몇 미디어들을 통해서 다행이나마 퍼지고 있는 중이다. 자기를 뽑아줬다고 온 국민이 병신인 줄 아는 어린아이 같은 대통령. 이야기에서는 공손함과 덕으로써 감싸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부분은 솔직히 공감이 되지 않는다. 자기한테 좋은것들만 흡수시켜주는 필터를 가진 그에게 이러한 공손함과 덕은 곧 자신에 대한 아부나 우러럼으로 보여서 더욱 기만한 행동을 하지는 않을까? 아니 이미 그런 행동을 하고는 있지 않을까? 어쩌면 주요 측근 중에서 이러한 식으로 그를 변화시키려는 자들은 없을까? 아 이런 사람들은 있을리가 만무하겠다. 모두 그냥 대체없는 병신들이니깐

그네들의 말도 안되는 행동에 대응해서 싸우는 우리는 수레바퀴에 달려드는 사마귀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힘입고 돈있는 자들은 그를 따르며 행동을 취할 것이다(어디까지난 대부분. 전부가 아니고). 결국 힘없는 개개인이 한명 한명 수레바퀴에 뛰어들어서는 무조건적으로 밀어붙이는 수레바퀴를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마귀들이 떼거지로 모여들어서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원동력을 제거한다면 어쩌면 그러한 문제는 막을 수도 있지않을까? 중요한 것은 곧 단결이다. 촛불의 힘이 부족하여서 완벽한 변화를 만들지 못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정도의 단결력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국민들의 소리를, 많은 동포들이 느낄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와 함께 얼마나 이번 정부가 대책 없는 정부라는건지도 확실히 증명을 하였고.

뛰어난 조련사는 사나운 범의 성질을 알고 바로 그 범을 길들일 수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얍삽한 쥐새끼도 사람들이 그 얍삽함을 알고 길들일 수가 있을까? 생쥐를 조련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는가? 길들일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될까?

최대한 세상을 중립적인 입장에서 보고자 노력하지만(그래서 용산현장 속보가 터졌을 때, 현장과 관련된 정보가 하나도 없을 때 무조건적으로 정부를 욕하지는 않았다. 곧이어 어떤 식으로 그런 참사가 벌어졌는지 뉴스를 듣고 격분을 하게 되었다)쉽지가 않다.

ㅇ ㅆ ㅂ.

대한민국의 최상위에 있는 쓰레기 껌찰들의 말도 안되는 껌찰결과를 보고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은 새벽, 횡설수설 쓴 글이라 뭔 소리인지 나도 모르겠지만, 한가지 확실한건.....나도 결론은 못 내리겠다. 아무튼 지랄같다...ㅇ ㅆ ㅂ

소통이 되야지 감싸던가 덕을 주던가 하지....에라이 먹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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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곽자기는 책상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하늘을 우러러 보며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동안 온몸에서 생기가 사라져 버리면서, 혼이 나간 빈 껍데기처럼 변해갔다. 곁에서 모시고 있던 안성자유가 그 모습을 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일일까? 살아 있는 몸뚱이가 마른 나무처럼 굳어버리고, 마음 또한 불 꺼진 재처럼 되어버리다니...지금 책상에 기대 앉은 사람은 앞서 책상에 기대 앉은 선생님이 아니로구나."

 

 이때 자기가 다시 정신을 차린 듯 언을 불렀다.

 

 "언아, 방금 나는 나를 잃었는데, 너도 그것을 알고 있었더냐? 그러나 아직은 멀었다. 너는 인뢰(사람의 음악)는 알고 있어도 지뢰(땅의 음악)는 들은 적이 없을 것이다. 설령 지뢰를 들어보았다 하더라도 천뢰(하늘의 음악)를 듣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자세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땅이 토해내는 숨결을 바람이라고 한다. 바람이 일지 않으면 별일 없지만, 일단 바람이 일면 땅 위의 모든 구멍들이 소리를 내게 된다. 너는 혼자서 긴 바람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느냐? 그 바람이 산 숲을 뒤흔들면 백 아름이나 되는 거목의 갖가지 구명, 즉 우리 몸의 코나 입이나 귀, 혹은 병이나 절구와 같은 물건 모양, 혹은 땅의 연못이나 웅덩이처럼 모양과 깊이가 가지각색인 구멍들이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 구멍에 따라 물이 흐르는 소리,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 나오는 소리, 들어가는 소리, 외치는 소리, 곡 소리, 아득히 먼 소리, 새 우는 소리, 위잉하고 울리면 휘익하고 받으며 바람의 힘에 따라 때로는 약하게, 때로는 강하게 자연의 교향악을 연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윽고 큰 바람이 한번 지나가면 모든 구멍들은 일제히 울음을 그친다. 그러나 아직도 하늘거리는 나뭇가지와 잎들에서 방금 지나간 바람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지뢰라는 것은 땅 위의 구멍들이 바람을 받아 울부짖는 소리로군요. 모든 구멍이 소리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인뢰는 인간이 불어 연주하는 악기 소리가 되겠습니다만...천뢰란 어떤 것입니까?"

 

 "천차 만별의 사물에 작용하여 스스로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이다. 모두 스스로 취하지만, 노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 '천뢰를 듣는다' 는 것은 일체의 상념을 버려야 비로소 무한한 조화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07년도 싸이에 썼던 글

천뢰....자연의 소리보다 한차원 높은 소리라는 해석을 보인다. 내가 보기에는 지뢰나 천뢰나 한끝 차이 밖에 없는 듯 하지만, 굳이 차이를 든다면, 지뢰는 소리는 소리이되, 사람이 직접 물리적으로 듣게 되기때문에 인간의 주관이 들어가지만 천뢰라 함은 모든것을 초월한 상태에서 듣게 되는 소리로 보인다. 결론은 무슨 소리인지 이해는 못하겠다는 것이다. 자연의 소리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거 같은데...오랜만에 장자를 보면서 이 대목을 읽으면서, 처음 접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말 오랫동안 나는 자연의 소리를 내 마음속에서 잃어버린 것 같다. 한동안 삶에 찌들여 살면서 인간들이 만들어낸 사회속의 소리들만을 계속 들어왔다. 게다가 이동중에는 항상 MP3를 귀에 꽃은 채로 완벽한 인뢰만을 들으며 생활을 하였다.

지난 여름 동남아 여행을 다녀온 뒤로 제대로 자연의 소리를 느껴보지 못한 것같다. 풍경을 보러 갔다고 해봤자, 광안리 정도? 하지만 사실 광안리 같이 도심속에 있는 바닷가에서는 왠지 자연의 정감을 느끼기는 힘든듯 하다.

최근에 타지역으로 다녀온, 여행이라고 하면 여행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태안까지의 이동. 천혜의 자연경관이라고 불리는 그 곳에서, 인간들의 실수로 인해 역시나 자연의 소리를 느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자연의 소리를 다시 찾기 위해 들려오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 곳의 기름을 제거하러 왔는지는 다들 다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인뢰 안에 내재해 있는 천뢰를 조금이나마 느끼고 오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본다.

 07년도는 이미 다 끝난간다...

 08년도가 되면 가까운 산이나 한번 다녀오도록 하여야겠다. 간만에 산속에서 조용히 앉아서 자연을 느껴보기 위해, 한적한 산으로 떠나자


그리고 지금 09년.

다시 읽어보지만 이 장자의 글 중에서도 이 글은 이해하기가 너무 힘든 듯 하다. 천뢰를 듣다라....지뢰라는 자연의 소리가 곧 자연스러운 소리 천뢰가 아닌가...스스로 소리를 내게 한다는 것이 자연의 소리와 흡사한데,  여전히 모르겠다. 해석이 잘 못 된건지 확인을 해봐도 그것도 아니고.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내 자신의 생각의 깊이는 1mm도 깊어지지 않은 느낌이다. 이런 글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사물을 보고, 사회의 현상을 보고 읽고 해석하는 능력의 발전이 전혀 없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09년도부터 다시 시작하는 블로그를 통해 좀 깊은 사유의 세계로 빠질 수 있도록 해야겠다. 블로그는 곧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공부할 수 있는 최첨단 지식의 샘물과 같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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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내가 사는 곳에 엄청나게 큰 나무가 있네. 사람들은 그 나무를 보고 가죽나무라 하더군. 나무 둥치가 옹이투성이라서 먹줄조차 댈 수 가 없고, 가지는 꾸불꾸불해서 자로 잴 수 조차 없는 형편이네. 그 때문에 길가에 서 있어도 목수들이 거들떠보지를 않네. 자네의 논의도 말은 그럴 듯하지만 결국은 그 나무와 다를 바가 없네. 세상 사람들이 상대할 턱이 있겠나?"


 "그럼 살쾡이는 어떤가?"


하고 장자는 받아넘겼다.


 "살쾡이는 가만히 몸을 숨기고 먹을 것을 노리다가 단숨에 확 달려드네. 어떤 곳에서라도 날쌔게 뛰어 돌아다니지. 그러나 그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은 덫이나 그물에 걸려 죽게 되네. 그것에 비하면 들소는 마치 하늘을 덮은 검은 구름처럼 엄청나게 큰 몸집을 갖고 있지만, 생쥐 한 마리 잡을 능력도 없네. 그러나 무능한 것 때문에 죽지 않고 살게 되지. 자네가 그런 큰 나무를 두고 쓸모없다고 걱정할 건 없네. 무하유의 고을 넓은 벌판에다 심어두고 유유히 그 옆을 거닐며, 편안히 그 나무 그늘에서 쉬면 좋지 않겠나? 세상 사람에게 소용이 닿지 않으니 톱질을 받아 넘어질 염려도 없고 가지를 잘릴 걱정도 없네. 소용이 없다고 해서 고민할 까닭은 조금도 없는 것일세."





필요없는 것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많은 장자의 철학에서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저 역시 강력히 이 말에 동의하구요.


예전에 '기생충 제국' 이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기생충의 생태부터 시작해서, 그들의 존재의의(?) 등 다양한 관점에서 기생충에 대해 다른 책으로, 기생충을 좋아하든지 안 하든지 한번쯤은 읽어보면 좋다고 생각되는 과학서적 이었습니다. 그 곳에서도 기생충의 필요성에 대해서 상세히 기술되어 있더군요. 기생충들이 일종의 자정작용을 하여 생태계에 존재하는 동물개체의 수를 일정하게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하더군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몇몇 기생충은 수컷이나 암컷이 임신을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고 하네요. 그리고 어떤 곳에서는 기생충이 없어져서 개체수가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난 동물에 의해서(읽은지 오래되서 어떤 동물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생태계가 급속토록 파괴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었구요. 게다가 학설에서 실제로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많은 현대인들의 아토피로 고생하는 것이 '기생충이 없기때문' 이라며, 기생충들이 우리몸의 면역체계를 한 층 더 강화시켜준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심지어는 현직 청와대 높은데 있는 이모씨 역시 전혀 쓸모없는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정치에 관심을 두지않고, 이런 대통령을, 이러한 당을 뽑았다가는 나라에 큰일이 터질 수도 있다는 경각심과 함께 국민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일을 하기도 하였으니깐요(이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선거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까 두렵습니다. 아~~~ 제발)


자신의 주위에서 평소에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던 것들, 무관심하게 방치하였던 것들, 특히 인간관계에 있어서 이러한 관계정립에 대해서 한번 쯤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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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자가 이런 말로 장자를 비꼬았다.

"전에 위왕으로부터 큰 표주박 씨를 얻은 일이 있었네. 그것을 심어 열매를 맺게 되었는데, 표주박이 어찌나 큰지 닷 섬이나 들어가지 않겠나? 거기에 물을 가득 담으면 무거워서 들 수도 없었다네. 그래서 반을 쪼개어 바가지를 만들었지만, 그래도 너무 커서 물독에 들어 가지 않았네. 크기는 컸지만 아무 소용이 없는지라 그만 부숴버리고 말았다네."

 그 말을 장자는 이렇게 받아넘겼다.

"자네는 정말 큰 것을 쓸줄 모르는 사람이군 그래. 이런 이야기가 있네. 송나라에 대대로 실을 세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네. 직업이 직업인 만큼, 그의 집에는 손이 트지 않는 신기한 약을 만드는 비방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네. 어느 나그네가 소문을 듣고 그의 집으로 찾아가, 약 만드는 비방을 백 금에 사겠다고 하였네. 그래서 주인은 온 가족을 모아놓고 상의를 했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실을 빨아주고 생활을 해왔으나 벌이라고는 일년에 고작 오륙 금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이 약의 비방을 백금에 팔 수 있게 됐다. 어떠냐, 청을 들어주는게 좋지 않겠느냐?'

 한편 약 만드는 법을 배운 나그네는 오나라로 가서 왕에게 약의 효과에 대해 설명했네. 그때 마침 월나라가 오나라를 공격해오자 오왕은 이 사람을 장군으로 기용했네. 그리하여 한겨울에 일부러 월나라 군사를 물 위로 끌어내어 싸웠네. 손이 트지 않는 약 덕분에 오나라는 월나라를 크게 이길 수 있었지. 오왕은 그의 공을 가상히 여겨 땅을 떼어주고 제후로 봉했네. 이제 알아듣겠나? 약의 효과는 똑같지만 한 사람은 봉지를 얻게 되었고, 또 한 사람은 여전히 빨랫군에 불과하다네. 모든 것은 사용하기에 달린 것이야. 다섯 섬들이 표주박이라면, 왜 그것을 배로 만들어 양자강이나 동정호에 기분 좋게 한번 띄워볼 생각을 못했단 말인가? 너무 커서 물독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불평만 늘어놓고 있다면, 자신이 상식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이란 것을 자인하는 것밖에 더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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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송나라 사람이 장보라는 관을 많이 사가지고 월나라로 장사를 떠났다. 그런데 월나라에 가서 보니 그곳 사람들은 짧은 머리를 하고, 몸에는 먹물로 그림을 그리고 지냈다. 따라서 문명한 나라 사람들이 쓰는 관 따위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요는 선정을 베풀어 천하가 잘 다스려지고 있었으므로 의기양양하게 묘고야란 산속에 살고 있는 네 명의 신인을 찾아갔다. 그러나 요는 거꾸로 신인들에게 압도되어, 서울교외에 있는 분수가에 돌아와서도 정신이 멍해 세상사를 아득히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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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오가 연숙에게 말했다.

"접여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어떻게나 떠벌리는지, 어디까지가 이치에 닿는 것이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소. 정말 질리고 말았소. 마치 구름을 잡는 것 같은 이야기뿐이라서, 보통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요."

"대체 어떤 이야기였소?"

"어디 한번 들어보겠소? 그의 과장은 이런 정도요.
'묘고야란 산에 신인이 있는데, 살결은 눈처럼 희고 몸매는 처녀처럼 나긋나긋하다. 바람을 받아들이고 이슬을 마실 뿐, 곡식 같은 것은 일절 입에 대지 않는다. 어떤 때는 구름을 타고, 또 어떤 때는 용을 타고 우주 밖에서 노닌다. 별로 하는 일은 없지만, 신인이 있다는 것만으로 상처를 입거나 병이 든 사람은 구원을 받고, 온갖 곡식이 다 잘 익는다.'
그의 말은 모두 이런 식이오. 하도 터무니 없는 이야기라서 도저히 곧이들리지가 않았소."

연숙이 말했다.

"하긴 그렇기도 하겠소. 속담에 '장님에게는 아름다운 색깔이 보이지 않고, 귀머거리에게는 아름다운 가락이 들리지 않는다.' 고 하더니, 선생이 바로 그렇구려. 신인이라 불리는 사람의 덕은 이 우주를 뒤덮고 있소. 보잘 것 없는 천하를 다스리면서 아둥바둥하는 인간과는 근본이 다르단 말이오. 또 신인은 어떤 것에도 지배당하지 않는 존재요. 물이 하늘까지 닿을 듯한 홍수에도 신인은 빠지지 않소. 쇠와 돌을 녹이고 땅을 태울 만한 열도 신인에게 화상을 입히진 못하오. 세상 사람들이 성군이라고 칭찬하는 요나 순 같은 이는 신인의 '발톱의 때' 만 가지고도 만들어낼 수 있소. 과연 상식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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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명의 곤이라는 고기는 머리에서 꼬리까지가 몇천리인지 모를만큼 컸다. 곤은 변신하여 붕이라는 새가 되는데, 이때 몇천리인지 알 수 조차 없는 그 몸뚱이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면 하늘이 검은 구름에 덮인 것처럼 보였다. 바람이 불어 바다가 거친 계절이 되면 붕새는 남명, 곧 천지를 향해 날았다. 온갖 이상하고 기이한 이야기들이 실려있는 '제해' 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남명으로 떠날때의 붕새는 바다 위 3천리를 날개로 치고 날아오른 다음, 바람을 타고 9만리 높이에까지 솟아오른다. 그리하여 남명까지 여섯 달 동안을 쉬지 않고 날아간다.'

땅 위에는 아지랑이가 끼고, 먼지와 생물들의 숨결이 가득 차 있다. 그런데도 하늘은 그저 새파랗게만 보인다. 그것은 하늘빛이 원래 푸르러서가 아니라 다만 끝없이 먼 거리가 하늘을 파란 빛으로 보이게 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9만리 상공을 나는 붕새의 눈에는 이 땅위가 다만 파란 빛으로 보일 것이다.

또한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수 없다. 마루 틈새에 고인 한잔 물에도 겨자씨 따위는 떠 있지만, 거기에 잔을 띄우면 그만 바닥에 닿고 만다. 물은 얕고 배는 크기 때문이다.

하늘을 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커다란 날개를 펴려면 큰 바람이 필요하다. 9만리 높이까지 날아오르면 붕새의 날개는 강한 바람의 힘에 의지하게 된다. 바람을 탄 채 푸른 하늘을 등에 업고 나는 붕새의 앞길을 가로막을 것은 없다. 그리하여 붕새는 줄곧 남명을 향해 나는 것이다. 그러나 매미와 발의새(작은 비둘기)는 그런 붕새를 비웃게 마련이다.

"느릅나무나 박달나마 가지에 날아오르는 것도 힘에 겨워 제대로 가지 못한 채 떨어지고 마는 경우가 있는데, 멀리 남쪽으로 9만리나 날아가려고 하는 저 새의 기분은 도저히 알 수가 없단 말이야."

교외에 나가는 정도라면 하루치 식량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백리쯤 되는 길을 떠나는 사람은 하루 전에 쌀을 찧어놓아야 한다. 만일 천릿길을 떠날 사람이라면 석달전부터 양식을 준비해야만 한다. 그러니 매미나 발의새 따위가 무엇을 알겠는가? 작은 세계에 사는 것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큰 세계가 있는 것이다.

시간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짧은 시간을 사는 것들은 오랜 세월을 알 길이 없다. 아침에 돋아났다가 저녁이면 시들고 마는 조균(하룻살이 버섯)으로서는 하루가 얼마나 긴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한 철을 사는 매미 또한 1년이 얼마나 긴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짧은 세월이라고 말한다.

옛날에 초나라 남쪽에 있던 명령이라는 나무는 1천년에 하나씩 나이테를 더했다. 또 대춘이라는 나무는 1만 6천년에 하나씩 나이테를 더해갔다고 한다. 이런 것들에 비한다면 수백변을 살았다는 팽조가 부러워 그렇게 살아보고 싶어 발버둥치는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얼마나 가련한 것인가!!

은나라 탕왕과 그의 신하 극과의 문답에도 붕새가 언급되어 있다. 땅의 북쪽 끝에 어두운 바다가 펼쳐져 있는데, 그것을 천지라 한다. 거기에 곤이라는 고기가 사는데, 등의 너비는 몇천리나 되며, 그 길이는 얼마인지 알 수 조차 없다. 또 거기에는 붕이란 새가 있다. 크기는 태산만하다고나 할까? 날개를 펴면 하늘이 검은 구름에 덮인 듯하다. 붕새는 바람을 타고 빙빙 돌면서 9만리 높이로 날아오른다. 앞길에는 구름 한 점 없다. 붕새는 푸른 하늘을 등에 업고 남쪽의 남명을 향한다. 참새가 비웃으며 말한다.

"바보 같은 짓을 하는군. 우리는 기껏 날아봐야 몇 길도 못 올라가서 다시 내려오고 만다. 그래서 이렇게 쑥대 사이를 푸드덕거리며 뛰놀고 있지만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저런 힘든 일을 하다니 정말 알 수가 없구나."

크고 작은 것의 차이가 여기에서 나타난다. 지식을 길러 관리가 된 사람, 공을 세워 한 고을의 원이 된 사람, 재능을 인정받아 대신이 된 사람, 덕이 높다하여 임금의 자리에 있는 사람, 그들 역시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든 따지고보면 이 참새와 별 다를 것이 없다.
송나라의 영자는 그들을 속된 무리라고 비웃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방 같은 것에 전혀 동요되지 않았다. 자신과 남, 안과 밖을 분명히 구별해서 영예로운 것과 욕된 것이 자기에게 본질적인 것이 못 됨을 알고 있었다. 확실히 그는 세속에 초연해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가 참다운 자유를 얻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열자는 바람을 타고 하늘에서 놀며,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표연히 땅위로 돌아왔다. 그렇듯 그는 세상사에 속박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역시 바람의 힘을 빌어야 했다. 그러므로 그 역시 참다운 자유를 얻었다고 말할 수 없다.

천지 자연에 몸을 맡기고 만물의 육기에 따라 무궁한 세계에서 소요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참다운 자유의 존재인 것이다. '지인은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신인은 공적을 생각지 않으며, 성인은 명성에 관심이 없다.' 고 한 말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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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허유에게 천자의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말했다.

"태양이 떠올라 있는데도 횃불을 끄지 않는 것은 헛된 짓이오. 또 때 맞추어 비가 땅을 흠뻑 적셔주었는데도 논밭에 물을 주는 것은 불 필요한 짓이 아니겠소? 선생 같은 분이 나타났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천자의 지위에 앉아 있겠소? 천자의 자리를 받아주시오."

"지금도 천하는 잘 다스려지고 있소. 그러한 지금 내가 새삼스러이 천자가 된다면 나는 천자라는 이름을 바라는 것이 되지 않겠소? 이름이란 실상의 부수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오. 나더러 부수물이 되라는 말씀이오? 뱁새는 넓은 숲속에 집을 짓지만 나뭇가지 한 개를 필요로 할 뿐이며, 두더지가 황하의 물을 마셔도 배만 차면 족한 것이오. 부디 분부를 거두어 주시오. 천하가 주어져도 내게는 아무 소용이 없소. 비록 음식을 만드는 포인이 제사 음식을 만들지 않더라도 시축이 어슬렁 어슬렁 부엌으로 나가지는 않는 법이오."

* 시축 : 시(尸)는 '신주(神主)' 또는 '맡아한다'는 뜻이다. 축(祝)은 '빈다'는 뜻도 되고, '제사 음식 차리는 일을 돕는 사람' 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흔히 제사를 주관하는 '제주' 로 풀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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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 장(莊). 이름은 주(周). 송(宋)의 몽읍(蒙邑:河南省商邱縣 근처) 출생. 정확한 생몰연대는 미상이나 맹자(孟子)와 거의 비슷한 시대에 활약한 것으로 전한다. 관영(官營)인 칠원(漆園)에서 일한 적도 있었으나, 그 이후는 평생 벼슬길에 들지 않았으며 10여 만 자에 이르는 저술을 완성하였다. 초(楚)나라의 위왕(威王)이 그를 재상으로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저서인 《장자》는 원래 52편(篇)이었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것은 진대(晉代)의 곽상(郭象)이 산수(刪修)한 33편(內篇 7, 外篇 15, 雜篇 11)으로, 그 중에서 내편이 원형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

【사상】인간의 마음은 일정한 시대 ·지역 ·교육에 의하여 형성되고 환경에 의해 좌우된다. 이 마음이 외부 사물들과 접촉하여 지식이 생긴다. 이러한 지식은 시대 ·지역, 그리고 사람들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보편타당한 객관성을 보장할 수 없다. 장자는 이러한 지식에 입각한 행위를 인위(人爲)라고 한다. 물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하여 그것을 이어주거나 학의 다리가 길다고 하여 그것을 잘라주면 그들을 해치게 되듯이 인위는 자연을 훼손할 수 있다.

장자는 노자(老子)와 마찬가지로 도(道)를 천지만물의 근본원리라고 본다. 도는 일(一)이며 대전(大全)이므로 그의 대상이 없다. 도는 어떤 대상을 욕구하거나 사유하지 않으므로 무위(無爲)하다. 도는 스스로 자기존재를 성립시키며 절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자연(自然)하다. 도는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거미 ·가라지 ·기왓장 ·똥 ·오줌 속에도 있다. 이는 일종의 범신론(汎神論)이다.

도가 개별적 사물들에 전개된 것을 덕(德)이라고 한다. 도가 천지만물의 공통된 본성이라면 덕은 개별적인 사물들의 본성이다. 인간의 본성도 덕이다. 이러한 덕을 회복하려면 습성에 의하여 물들은 심성(心性)을 닦아야 한다. 이를 성수반덕(性脩反德)이라고 한다. 장자는 그 방법으로 심재(心齋)와 좌망(坐忘)을 들었다. 덕을 회복하게 되면 도와 간격 없이 만날 수 있다.

도와 일체가 되면 도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볼 수 있다. 이를 이도관지(以道觀之)라고 한다. 물(物)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보면 자기는 귀하고 상대방은 천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보면 만물을 평등하게 볼 수 있다. 인간은 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자연에 따라 살아갈 수 있으며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러한 자유는 천지만물과 자아사이의 구별이 사라진 지인(至人)이라야 누릴 스 있다. 이 지인은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고 천지만물들과도 사이좋게 살아갈 수 있다. 장자의 사상은 대부분 우언(寓言)으로 풀이되었으며, 그 근본은 노자(老子)의 무위사상(無爲思想)을 계승하는 것이지만, 현세와의 타협을 배제하는 점에서는 더욱 철저하여, 바로 그와 같은 면에서 장자의 분방한 세계가 펼쳐진다.

【영향】이러한 장자사상은 위진현학(魏晉玄學)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남북조 시대에 성행한 반야학(般若學)과 당나라 때 융성한 선종(禪宗)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현종(玄宗)은 그에게 남화진인(南華眞人)이라는 호를 추증하였으므로, 《장자》는 《남화진경(南華眞經)》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읽혔다. 송(宋) ·명(明) 이학(理學)은 유학을 위주로 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장자철학을 수용하였다. 장자의 이러한 초탈사상은 자연주의 경향이 있는 문학 예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한국에서는 조선 전기에 이단(異端)으로 배척받기도 하였으나 산림(山林)의 선비들과 문인들이 그 문장을 애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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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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